말씀묵상 세미나 1: 지성배 목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 : 12 -14)
[로마서 13장: 10-12]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0~12, 개역한글)
[로마서 12장]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21, 개역한글)
예수님이 좋은이유: 김정곤 목사
삼육부산병원 & more
마태복음 25:40-46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0~46, 개역한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내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내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60 : 1 - 3
기도의 파동과 구속의 계획: 조병일 목사
[시편 91:9-16]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시편 91 : 9 - 16
[욥기 12: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Ted Wilson: 3abn fall camp meeting
앤드류 강 목사: 방언에 대하여
마지막 사명 & more
김일목: 용산 장막부흥회
6. 성령하나님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
3.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5.성령의 열매
주 만나기를 예비하는 삶 & more: 김일목 목사
4.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인가?: 주 만나기를 예비하는 삶
김일목 목사 & more
4.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인가?: 주 만나기를 예비하는 삶
김일목 목사 & more
- 왜 성령을 이해하는것이 필요한가? : 김일목 목사
주 만나기를 예비하는 삶: more
: 김일목 목사
https://m.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A3%BC+%EB%A7%8C%EB%82%98%EA%B8%B0%EB%A5%BC+%EC%98%88%EB%B9%84%ED%95%98%EB%8A%94+%EC%82%B6%3A++%EC%99%9C+%EC%84%B1%EB%A0%B9%EC%97%90+%EB%8C%80%ED%95%9C+%EC%9D%B4%ED%95%B4%EA%B0%80+%ED%95%84%EC%9A%94%ED%95%9C%EA%B0%80(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장 8절)
단비같은 방송-감우 & more
김일목 교수(& 목사) & more
착취에 대한 견책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비결:
율법의 완성: 사랑(김대성 전 한국연합회장)
abn tv 설교동영상 종합 & more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 : 3 - 8
쇼킹 발표회!
기독교 포럼 100주년 기념관: 김대성 목사(전 한국 연합회장)
구주의 오심이 예언됨: 선지자와 왕
<구주의 오심을 예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자손을 통하여 시온에 구원을 주실 것이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사 11:1, 7:14, 15).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2~5, 10).
다윗의 자손은 다윗성에서 탄생하셔야 하였다.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하였다. PK 697.5
다윗의 자손은 다윗성에서 탄생하셔야 하였다.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하였다. PK 697.5
“또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릴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 2:6). PK 697.6
너는 유다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릴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 2:6). PK 697.6
초림의 시기와 구주의 필생의 사업과 관련해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알려 주었다. 천사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고 말했다. 예언상 하루는 일년에 해당한다(민 14:34; 겔 4:8 참조). 70 주일 혹은 4백90일은 4백90년을 나타낸다. 이 기간의 기산점(起算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 즉 69 주일 혹은 483년이 “지날 것이요”(단 9:25).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Arta-xerxes Longimanus)의 조서에 의하여 완성된 예루살렘의 재건령(再建令)은 기원전 457년 가을에 내렸다. 이때부터 483년은 서기 27년에 해당된다. 예언에 따라 이때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나타나야 하였다. 서기 27년 예수께서는 당신의 침례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그 후에 곧 당신의 봉사를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때가 찼”다는 기별이 선포되었다.
산상보훈 1: 노우호 목사
하나님의 율법을 배움: 선지자와 왕
5장 봉헌식: 시대의 소망
채널 7 & more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실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존귀와 높임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순종의 길로 행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셨을 것이다.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고 모세는 말하였다.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열국은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신 26:19, 28:10, 4:6)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충실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계속적인 역경과 굴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시대의 소망 2장 선택된 백성-
신약 4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연구: 예수님의 생애 연구
*시대의 소망:1장 임마누엘
임마누엘: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그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로 인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고 그 두려운 비상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기로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었다.
-시대의 소망 1장: 임마누엘-
은혜
김대성 목사: 재림교회 재평가 포럼
로마린다 교회 방송설교& more
김영린 목사: 로마린다 의과대학 교회
우리가 믿는 예수님!!
[요한복음 3: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은혜의 복음 & more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의 하나님!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개역한글)
[요한복음 8:51]
만나주석
(요8:51)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믿는 자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영원한 심판의 죽음, 즉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첫째 사망은 잠일 뿐이지 사망이 아니다. 침대에 누워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자녀는 그 부모가 보기에 죽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의식이 없어 마치 죽은 것과 같지만 일어날 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죄악 세상의 피곤을 못 이겨 잠시 잠이 들 수는 있지만(첫째 사망)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죽음(둘째 사망)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 8:51, 만나주석)
우리가 믿는 예수님!!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사람으로 존재하는 이유
시간이 많지않음: 덕 베칠러 목사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전서 5장 6절)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 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세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편 20 : 1 - 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 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데살로니기전서 5 : 16 -24)
10/2/2019
(요14:6)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아멘!
(요14:6)
[개역한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른성경]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한다.
[NASB] 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through Me.
[KJV] Jesus saith unto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man cometh unto the Father, but by me.
(요 14:6, 역본대조)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구제: 채영석 &more
예언연구 & 말씀연구
Kenneth Cox & more
10/2/2019
예수님을 알자
그분에 대해서 공부하자
그래서
요한복음 연구 시작!
[요2:8, 요약, 만나주석 참조]-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곧
하나님의 뜻임과 아울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다!
[요2:9 요약, 만나주석 참조]-
*말씀이신 그리스도 즉
진리를 아는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자유케 되는 길이며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아멘!
Praised the Lord!!!
성경이 말한다: 이대영 & more
산상보훈이 보편진리:
그리스도인의 duty!
10/1/2019
*<말씀묵상>
음과 양이 존재하고
선과 악이 존재하며
흑과 백이 있고
밀물과 썰물이 있으며
낮과 밤이 있고
남과 여가 있다
그럼
그래서
너와 나도
엄청 다르겠구나!
세상만사 만물의 이치가
이렇게 두가지 다른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래서
그럼
영원히 연구할(측량못할)
숙제들이
있으니
그속에서 우린 계속
자라나고 있구나...
전도서 3:11이 의미심장하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장 11절)
*<성경번역>
[개역한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바른성경]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또한 사람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NASB] He has made everything appropriate in its time.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ir heart, yet so that man will not find out the work which God has done from the beginning even to the end.
[KJV] He hath made every thing beautiful in his time: also he hath set the world in their heart, so that no man can find out the work that God maketh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전 3:11, 역본대조)
*<재림교 주석>
11. 아름답게. 창 1:31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설명과 비교하라. 모든 것이 “좋았”을 뿐 아니라 아름다웠고,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실제적인 용도에 완전했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취향에도 좋았다. 몇 가지 사물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또. 이 말은 저자가 독자들이 간과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추가적인 요점을 암시한다.
영원. (제임스왕역(KJV)에는 “world”[세상]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올람(‘olam). “숨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올람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올람의 의미에 관하여 좀 더 연구해 보려면 출 12:14; 21:6 주석을 참조하라. 올람을 “세상”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영원”, “영구”, “연속”으로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일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내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공의 무한성에 관한 이같은 인식은 이 세상 사물의 덧없는 성질에 불만족스러움을 불러 일으킨다. 참조 14절 주석.
마음. 그들의 사상 속에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물질세계가 인간 존재의 총화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은 두 세계와 연결된다. 즉 육체적으로는 세상에, 지성적·정서적·심리적으로는 영원한 세상에 연결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의식을 갖고서도 인간은 이 불만족스러운 삶의 좁은 경계선 저 너머에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주셨느니라. 문자적으로 “주어졌다.” 이 의미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한 경이로운 사물들 속으로 혹은 하나님이 계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신 영원한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사실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더 밀접한 연합을 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전 3:11, 재림교주석)
*<만나주석>
11. 하나님이 … 아름답게 하셨고.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실 때 ‘좋았더라’(창 1:31)고 하신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이 2-8절에 암시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하실 때 아름답고 흠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 주셨느니라(하올람 나탄 벧리밤). 이는 ‘그가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 of men, NIV,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ir heart, NASB)의 뜻이다. 이는 죄악된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 및 그로 말미암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 전체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사(창 1:27)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영원’이란 말을 ‘세상’(the world, KJV)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Luther), 다른 사람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나(G.A. Barton) 그 근거는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를 한글 개역 성경처럼 ‘영원’ 또는 ‘영원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Nowack, Ginsburg, Wangeman, Wright).
그러나 …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으되, 인간은 제한적인 피조물인 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더더욱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마음과 생각이 부패되고 왜곡된 바(렘 17:9, 롬 1:21) 그런 상태에서는 하는 일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전 3:11, 만나주석)
권성근 목사: 선교적 교회사명
치료봉사
1편 참된 의료선교사
1장 우리의 모본
추수꾼 필요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 : 1 - 2)
[빌립보서 4:8-13]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유다서 1:24]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는 시편 기자들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지경에서 자신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을 반영한다(시38:16, 56:13, 66:9, 73:2, 91:12, 116:8, 121:3-8, 140:4, 141:9). 신약 성경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요17:11, 롬16:26, 엡3:20, 살후3:3, 계3:10). 유다는 이러한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교리 그리고 부도덕성에서 보호하셔서 파루시아 때에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임을 드러냄으로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한편 ‘흠이 없게’의 헬라어 ‘아모무스’은 제사 용어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실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하게 하셔서 자신의 존전(尊前)에 담대하게 그리고 즐거움으로 설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유 1:24, 만나주석)
🏡2019년 9월 26일 “3분의 기적”
(하루 3분의 말씀 묵상을 통해 당신의 삶에 기적을 체험하세요!)
제목: 두려움의 집에서 은혜의 집으로
[요한복음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25일 특별새벽 기도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하신 김경환 선교사(SRC International 대표)님의 설교입니다.
🌱저의 딸과 자동차를 타고 LA에서 시애틀까지 여행을 갔습니다.
3일정도 지나니 딸이 마음을 열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게 되면 전 저같이 키우지 않을 거예요.“
이 말은 자신을 왜 이렇게 키웠냐는 원망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물으니 딸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이 참 많았는데 어린 시절에는 하지 말라는 말만 들으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두려운' 아이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
‘집’은 누군가에게는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위한 '살 집’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투자하는 '팔 집'입니다.
저의 딸에게 있어 집은 엄마의 병실이었고 ‘두려움의 집'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이기에 저희 집은 당연히 은혜의 집이라 생각했지만 어린 딸에게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와 사역이 바쁜 아빠의 부재로 깊은 정막이 흐르는 집은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딸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왜 우리 아빠, 우리 엄마 빼았아 갔어요 돌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두려움의 집에서 은혜의 집으로 가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의 고백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연못물이 움직여버려 기적의 기회를 잃은 후, 그 작은 소망마저 다 없어진 다음에야 38년된 병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며 두려움의 권능에 붙들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 병자에게 다가가 예수님은 '너는 적어도 나에게는 투명인간이 아니다.' 노바디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다”라고 가까이 가셔서 말씀하시며 38년 된 환자의 두려움을 몰아내셨습니다.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그제서야 내 심령을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그 말씀이 들리기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살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능동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수동태 인생입니다.
저는 딸아이의 <엄마의 침실>이란 글을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어린 딸이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이 없었기에 하나님 앞에 “아빠 돌려주세요, 엄마 돌려주세요”라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주 목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도사를 지낸 사람입니다. 무려 13년동안 전도사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신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혼을 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그 가정에서 처음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교사가 될 사람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복 주셔서 인생이 잘 풀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결혼한지 4년만에 6개월 간격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몸이 점점 나빠지더니 34kg이 되고 혈압도 너무 내려가 해골이 되었습니다.
희귀병으로 해골처럼 피골상접한 아내를 보며 저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지만 아내의 몸은 더 악화되었고 제 인생도 암울해졌습니다.
5년동안 암흑기로 제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찾아오셨습니다.
34kg의 몸으로 아내는 약을 5~6가지나 먹고 있었고, 그 약을 먹으면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한데 임신이 된 것입니다.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데 어떻게 9개월동안 아이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너무 불안했습니다. 임신중이나 출산 중에 어떻게 될까 불안해서 기도도 막혔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 아내는 35Kg으로 자연분만을 했습니다. 그 아이를 받아들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생명에 관한한 불가능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건은 의학백과사전을 다시 써야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는 의사가 아이를 저에게 건네 주는데 저는 그 아이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5년간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실하지 못했던 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곧바로 화장실로 갔고, 가자가자 말자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저 밑바닥에 있는 저의 모든 아픈 것, 더러운 것들이 터져 나와서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밖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 좋은 날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슬피 우는가? 혹시 자기 딸이 아닌 것 아닌가?”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생명이다. 너는 네 새명으로 살지 말고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으로 살아라”
신앙은 수동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수동태 인생입니다.
그날 저는 그동안의 능동태 종교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수동태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딸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JOY”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 즉 하나님을 먼저, 다른 사람을 두번째, 너를 세번쨰로 여기면 네 인생에 기쁨이 있다란 뜻입니다.
딸은 저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해줍니다.
능동태의 종교생활을 멈추시고 수동태의 은혜 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희 딸 Joy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듣고 살아났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아 살아났습니다.
저희 딸은 달라졌습니다. 방과후 똑 같은 집은 똑같은데 그 집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무거운 침묵과 어둠이 있는 두려운 집이 아니라 은혜의 집이 되었습니다.
딸의 글 <엄마의 침실> 후반부에는 달라진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는 사람 사는 집, 사람을 살리는 집, 은혜의 집이 되었다. 비록 엄마에게 말하는 것이 혼이 없는 시체에 말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내 이야기와 내 소리가 엄마에게는 담을 넘어 저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이기에 나는 엄마와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독백하듯 이야기했지만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는 유일한 청중이 되었으며, 내 마음을 담아 쓰는 일기장이다.”
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침묵의 껍질을 벗고 입을 열어 자신의 인생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청소년 기독교 모임, 선생님 앞 등등 부모의 고통 앞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딸은 점차 두려움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주축이 되어 시작한 성경모임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는데 제가 강사로 갔습니다.
딸은 가장 친한 친구가 여기 왔다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께 왜 우리 아빠를 뻇어갔냐고 소리쳤던 딸이 저를 그렇게 소개한것입니다.
말씀을 전한 후 고등학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딸이 고3이 되었을 때 엄마가 병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에 갔습니다. 은혜의 집을 경험한 것입니다.
졸업식날 딸은 전교 학생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고 그 자리에 이제껏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한 여인이 참석했습니다.
바로 저의 아내였습니다.
처음으로 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보고 행복하게 우는 아내를 보며 이것이 은혜이고 감격임을 실감했습니다.
두려움의 집을 떠나 은혜의 집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기적이 됩니다.
38년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병자의 곁에 예수님이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 주시고 병상의 두려움을 내쫓아주셨듯이,
우리모두 내 능력으로 사는 능동태 종교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주님의 보혈로 살아가는 '수동태의 은혜와 기적'을 살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들리지 않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시고 짧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려움의 집이 아니라 은혜의 집에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는 목소리를 듣고, 저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손을 잡습니다.
능동태 종교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주님의 보혈로 살아가는 '수동태 인생으로 주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은혜의 집에서 영원까지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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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의 기적
계시록 안교교과: 김윤자 장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교회
우리의 인생
미움 해결책
또 와보고싶은 교회
잇몸 & 허리 & 건강상식
젊게 사는법!
미움 해결책
또 와보고싶은 교회
(유다서 : 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2-51 연구]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 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 4:1-4, 6:20, 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 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 살전 2:13).
3. 만물이. 원문상 ‘만물’(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 …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은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 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 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헬라어 ‘에게네토’은 ‘ …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 …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 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 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은 ‘영원한’(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 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 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탄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 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은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 5:10-47, 6:25-65, 7:14-36, 8:12-59, 9:39-10:18,22-39, 12:20-36, 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타인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 …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침례 요한’(마 3:1, 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침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7.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본 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침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증거자 침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침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 3:28-30).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 증거하러 온 자라.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 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침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9. 참빛. 6-8절에 걸친 침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 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 엡 5:8, 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은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 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각 사람(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엔 토 코스코 엔).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 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 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 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 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 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아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에그노)는 ‘알다’(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 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 5:26, 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 자기 땅에. 헬라어 ‘타 이디아’은 ‘자기 자신의’(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탄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 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탄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이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은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 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12. 영접하는 자.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 권세를 주셨으니.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은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은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 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 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 마 28:18, 막 2:10, 3:15, 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 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을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 마3:7-9). 둘째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 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숫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 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이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침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과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 절은 마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출 33:7, 9, 10 = 요 1:14]
(출 33:7, 9, 10)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출 33:11 = 요 1:17]
(출 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출 33:20, 23 = 요 1:18]
(출 33:20, 23)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 같이’, ‘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은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 3:18, 5:18, 10:30, 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은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5.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침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원어상으로 본 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침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침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침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침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침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침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 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침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침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침례 요한이 메시아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6.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은 ‘플레로마’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은 원래’ … 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 …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6절부터 16절까지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한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은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은 예수의 은혜로 대체되었는가? 아니다. 율법과 은혜는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함께 작용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를 보여 주고, 은혜는 그것을 채워준다. 은혜는 우리에게 용서를 제공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가리킨다. 구약은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하고, 신약은 이 예언을 성취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모세의 율법을 이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로 인한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반대하셨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순종하게 될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빛은 시내 산에서 영광스러웠지만 십자가에서는 훨씬 더 영광스럽다. 주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을 오해하고 율법과 은혜를 불필요하게 이분화시킴으로써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자라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깔아보면서 이 절[요 1:17]을 읽을 유혹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이 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긍정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지고 있다(예를 들어, 5:45∼47, 6A:32, 7:19∼23). 이 복음서에서 예수께 문젯거리는 모세와 율법이 아니라, 모세와 율법을 오용한 불순종하는 유대인에게 있었다(예를 들어, 6:31∼32, 9:28∼29).” (Gerald L. Borchert, John 1∼11,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roadman Holman, 2002], 123)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 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9.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침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침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침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침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침례 요한을 메시아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 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한의 증거.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20.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 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을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침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침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아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침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침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 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침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아’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아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침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21. 네가 엘리야냐. 이것은 당시 침례 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 (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라. 예수께서 침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 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침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침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침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침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침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 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침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네가 그 선지자냐. 요한의 두 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아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 7:37).
아니라. 이것의 헬라어 ‘우’은 본 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침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22. 또 말하되 누구냐.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침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침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23. 가로되. 본 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이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침례 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침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 막 1:2-4, 눅3:3-6).
주의 길을 …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침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침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 막 1:3, 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침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침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침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침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있는 용어 ‘카도스’(’ …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 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 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 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침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25.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침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침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침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침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아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 37:23, 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침례 의식이 메시아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26.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침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침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 막 1:8, 눅 3:16). 다시 말해서, 침례 요한의 물침례는 예수의 성령 침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침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침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침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침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침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침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침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 따라서 침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 눅 3:7).
27.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침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 막 1:7, 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침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아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침례 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아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침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침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28. 이 일은 … 된 일이니라.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침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침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 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 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29. 나아오심을 보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보라. 헬라어 ‘이데’은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침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 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 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은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본서의 본 장에서(본 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 마 8:17, 눅 22:37, 행 8:32-35, 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 레 14:10-25, 민 6:12).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있는데.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침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 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 가리키는 ‘안드로포스’과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 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됨을 암시한다.
계심이라.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으로서 침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와 침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침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침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과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 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본문은 침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침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 침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 슥 13:1). 당시의 침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 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침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침례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인 에 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침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 롬 6:4, 골 2:11, 12).
32.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하늘’(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 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 마 5:16, 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 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 1:15, 마 3:17, 막 1:11, 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침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33. 나에게 말씀하시되. 앞 구절과 연관되어 침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 25:8, 렘 2:2, 6:16, 겔 3:24). 이는 침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 … 머무는 것을 보거든.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 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 성령 침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 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침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눅 3:3)는 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침례는 성령침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34. 내가 보고 … 증거하였노라. 침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 막3:11, 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 5:26, 17:5, 19:7, 20:3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4:3의 주석을 참고하라.
35.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 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침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침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침례 요한의 제자로서 침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침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침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36.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침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침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는 안드레(1:40)와 요한이었다.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침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를 찾으러 갔다. 둘 중의 하나는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고 다른 하나는 전도자 요한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충동에 움직여 그들은 예수를 따랐다.” (DA, 138)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 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 10:17, 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 마 8:19, 19:27, 28, 막 6:1, 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 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 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침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38. 무엇을 구하느냐.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은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 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 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랍비여. ‘랍비’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 11:21, 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침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헬라어 ‘푸 메네이스’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 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 절, 41, 42절, 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 9:36, 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39. 와 보라. 이 말은 워어상 ‘오다’(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으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 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 … 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 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40.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 6:8, 마4:18, 10:2, 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 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41.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아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 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아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 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출 29:7-9, 삼상 10:1, 16:13, 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아’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 단 9:24). 그후 바벨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아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아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아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아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아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42. 보시고 가라사대.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 … 에이펜’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 마 26:31-35, 막 8:32, 33, 14:27-31, 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은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43. 이튿날.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침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아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 마 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 21장, 마 28:16-20, 막 16:7, 15-20, 눅 24:44-53, 행1:3-14).
빌립을 만나.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은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 ‘아콜루데이’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 9:21, 19:21, 막 1:18, 2:14, 6:1, 10:21, 52, 눅5:27, 9:59, 18:22, 요 21:19).
44. 빌립은 … 벳새다 사람이라.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 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벳새다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 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11:20-24, 눅 13:16).
45.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 … 기록한 그이름. 빌립은 메시아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침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침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아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빌립이 만난 메시아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아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47. 보라 이는 …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알레도스)과 ‘간사한’(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아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48. 너를 부르기 전에 … 보았노라. ‘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 미 4:4) 팔레스타인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49. 대답하되.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은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 임금이로소이다.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 23, 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4:3의 주석을 참고하라.
50.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아되심을 입증하셨다.
51. 진실로 진실로.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 6, 5, 막 3:28, 8:12, 눅 4:24, 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 5:24, 25, 6:47).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하늘이 열리고.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 보리라.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그가 본 놀라운 일보다 더 큰 일 즉 예수께서 인류의 중보자가 되셔서 구속의 계획을 이루실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 1:2~51, 만나주석)
[요한복음 1장 1절연구]
1. 요한복음의 주제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을 위해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요 예언의 성취자, 유대인의 왕 메시아로 제시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행동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누가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기록했다. 그는 예수님을 인자와 구세주 그리고 인류의 친구로 제시하였다. 구원의 보편성은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주제이다. 심오한 사상가였던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이요,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한다.
1:1-18.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간결한 문장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게있게 묘사하며 고도의 신학성 또한 가미하고 있다. 특히 본 장의 중심 주제에 해당하는 ‘로고스’(말씀)에 관한 사상은 본서 전체에 걸쳐 깔려 있고 본서를 해석함에 있어 관건이 된다.
태초에.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요한은 헬라어를 말하는 로마의 한 식민지 도시인 에베소에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에베소는 헬라 문화와 철학에 젖어 있는 도시였다. 또한 요한복음을 읽을 독자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헬라 철학에 젖어 있는 이방인의 도시였다. 그런 지역에서 요한은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 자신이 바로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이며 우주의 창조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에 있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말씀”(헬, 로고스)라는 헬라 사상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지 그 사상까지 채용한 것은 아니었다.
요한이 사용한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스’(logos)는 헬라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말이다. 헬라철학에서 로고스는, 근본적으로 우주는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고 영속된다는 우주관 및 역사관에서 온 지적 능력 혹은 이성(理性)이다. 로고스는 사물의 배후에 있는 영원한 질서이고 우주적 법칙이다. 헤라클레토스(Heraclitus)는 로고스를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원리로 보았다. 플라톤(Plato)에게 로고스는 단순히 어떤 개인적 기능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충만한 법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로고스를 인간 덕(德)의 원천으로 보았다. 스토아(Stoa)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우주적 원리로 보았다. 세계의 이성적 질서와 우주적 이성은 로고스 안에 표현되어 있으며 로고스는 인간에게 지식을 주는 법칙이다. 만물이 로고스에서 나오고 로고스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후기 스토아 철학에서는 로고스가 점점 자연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헬라 철학의 로고스는 인격적인 요소가 부족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요 이성적인 법칙이었을 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인격체(Redemptive Logos)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은 범신론적으로 흐르고 말았다.
예수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이요 지성인이었던 필론(Philo)에게 있어서도 로고스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로고스를 사용하는 필론의 용법은 다양해서 통일된 원칙을 찾아내기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헬라적 사상과 유대적 신념을 동시에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필론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은 아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우주와 동일시될 수 있다. 따라서 필론의 로고스가 헬라적인 개념이냐 유대적인 개념이냐 하는 것은 학자들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다르지만,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와 개념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필론의 로고스는 인격적인 요소가 분명하기 않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 당시 사용되는 헬라의 용어 로고스를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표현했다고 해서 헬라적 사고방식으로 로고스를 해석하면 안 된다.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는 헬라 철학의 로고스나 필론의 로고스와 그 개념이 다르다. 어떤 저자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상을 전달하고자 할 때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요한은 로고스를 범신론적이고도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우주의 법칙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설명한다. 즉 창조 전에 함께 있었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데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성육신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로고스라 하였으며, 동시에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뜻의 결정적 표현이기에 로고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로고스 사상은 헬라 철학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히브리 사상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헬라 철학에서의 “말씀”과는 달리 유대 사상에 있어서 “말씀”이란, 단순한 소리나 이성(理性)이 아닌, 실제적인 능력과 개성을 가진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구약에는 어느 곳이나 이런 “말씀”이 강력하고도 충만하며 창조적인 성격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며, 우리를 위험한 지경에서 구원하는 존재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시 33:6),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따라서 히브리 사상에서 말씀이란, 단순히 언어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똑같이 능력이 있으며 보내심을 받아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는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계시니라.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 …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문장에서 하나님 앞에 정관사 ‘호’(ho)가 없으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신(a god)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의 ‘신세계 번역’에서 “이 말씀은 하나의 신이니라”고 번역하고, 이 구절을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theos) 앞에 정관사가 없어도 창조주 하나님으로 쓰이는 용법이 신약에 나온다(막 12:32, 눅 20:38, 요 1:1, 8:54, 롬 8:33). 또한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즉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 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 양편의 명사에 다 정관사가 있을 경우 그 두 명사는 완전히 똑같은 것을 가리킨다. 즉 말씀이 아버지 하나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 사상이 무너지게 된다. 유일신 한 분만 존재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관사를 쓰지 않은 것이다. 하나는 관사가 있고, 다른 하나에 관사가 없을 경우 그 두 명사는 개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본질과 목적과 성품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 말씀은 개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본질과 목적이 같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 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써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요 1:1, 만나주석)
불행한 자들에대한 우리의 의무
[학개 1장 연구]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본 절은 가증스러운 변명으로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유다 백성들이 겪게 될 상황을 보여준다. 유다 백성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도 소득이 적었으며 먹고 마셔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었고 집에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재물을 모으려 해도 모이지 않았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가증스러운 변명이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는 낳게 되었음을 시사한다(T.V.Moore).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이 섬기려 하지 않고 성전 건축을 소홀히 한 결과였으며,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탐욕의 결과였다(8절, R.L.Alden).
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본 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이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예증으로 제시하며,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산’(하하르)은 정관사가 첨가된 단수 명사이다.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혹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가져왔기 때문에(왕상 5:5,6) 레바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혹자는 모리아 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하르’에 포함된 정관사는 어떤 특정한 지명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성을 드러내는 용법이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 백성들이 주변에 있는 산에서 성전 건축 자재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Keil, Delitzsch, Verhoef). 이러한 견해는 당시 유다 백성들이 상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레바논과 같이 특정 지역의 나무를 가져오는 것은 무리였음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높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거하던 그곳에서는 포로 생활 기간인 70년 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느 8:15,16, T.V.Moore). 하나님은 결코 엄청난 재물이 드는 자재를 가지고 성전을 건축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유다 백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재로 성전을 건축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화려한 건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음을 시사한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본 구절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한 결과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순종을 통해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얻으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에르체 보)는 문자적으로 ‘내가 그것안에서 기뻐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완공한 성전 안에서 기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 또한 ‘기뻐하고’는 주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희생 제사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이 언약적인 사랑과 자비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즐거이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P.A.Verhoef).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완공할 때 영광을 얻게 되실 것이다.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불어 버렸느니라’는 겨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유다 백성들은 많은 소득을 얻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실제로 얻은 소득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적은 소득조차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유익과 안위를 주지 못하였다.
이것이 무슨 연고뇨 … 빨랐음이니라. 본 구절은 유다 백성들이 적은 소출을 얻고 만족과 안위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빨랐음이니라’는 유다 백성들이 모든 관심과 촉각이 오직 자기와 집안의 안위에 쏠려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 곧 황폐할 정도로 훼파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자기 만족과 안위를 위해서만 정신을 쏟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였다.
10.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을 황무하게 내버려두고 오직 자기 집안 일에만 매달린 결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너희로 인하여’는 10,11절에 언급된 재앙들이 모두 유다 백성들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소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이슬’은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 그곳의 현실에서 농사를 짓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그것이 없이는 유다 백성들의 농사는 아무런 소출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기에 이슬의 그침은 땅이 소출을 낼 수 없으며 가뭄에 시달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내가 한재를 불러 … 임하게 하였느니라. 이슬이 내리지 않은 결과로 도래한 한재는 가히 유다 백성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피해를 끼쳤다. 한재는 ‘땅과 산’, ‘곡물과 포도주’,’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 그리고 ‘사람과 육축’등에 영향을 미쳐 유다 백성들의 하나님의 심판방법인 한재로 인하여 자신들의 의식주의 모든 근원을 파괴당하였고 극도의 피폐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학 1:6~10, 만나주석)
[고린도 전서 1:17]
17. 만세의 왕. 본 절은 바울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감사의 외침이다. 혹자는 이것을 ‘유대교의 예배 의식’이라고 주장하지만(Lock) 두가지 면에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첫 번째, ‘만세의 왕’이라는 표현이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엡 2:7, 3:9, 11). 이 표현이 유대인에게 친숙한 표현이긴 하지만,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위대한 왕으로 자칭했으나 단명한 ‘네로’와의 대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두 번째, 유대 사회에서는 두 세대, 즉 현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는 습성이 있었다. 바울은 두 세대 가운데서 공히 지배하시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Guthrie).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본문은 ‘만세의 왕’과 동격으로 세상의 모든 왕이나 다른 신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존성(至尊性)을 강조한다. ‘썩지 아니하고’(아프다르토)는 성경 전체에 언급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시 103:15-17, 롬 1:23).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달리 불변성을 지니시기에(시 45:6, 히 13:8) 신자의 영생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 ‘보이지 아니하고’(아오라토)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계신 영이심을 말한다(골 1:15, 6:16).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며 다만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히 11:27). ‘홀로 하나이신’(모노)은 하나님이 다른 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시고 초월적인 신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 되심을 강조한다(요 17:3, 엡 4:6).
(딤전 1:17, 만나주석)
[시편 37:8-12]
8. 분을 그치고. 악인이 수월하게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분노하고 불평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대하여 중얼거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순간만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이다(Bares).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일순간적인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볼 때 분을 품고 노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설명한 문장이다. 즉, 그와 같은 흥분 상태로 말미암아 자신도 동일하게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의 진영에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Anderson).
9.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 행악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의 가나안 민족들이 맞았던 것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신 12:29:19:1). 즉, 가나안 족속이 멸망한 것처럼 행악자는 파멸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기대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카와’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 ‘대망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경건한 자로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는 자의 신앙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땅을 차지하리로다. 원문에는 ‘땅’ 앞에 ‘그들’(헤마)이라는 강조사가 있다. 따라서 원문의 감각을 살려서 번역하면 ‘그들 ! 바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즉 그를 경외하는 자들, 그들만이 진정으로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잠 2:21, 10:30, 사 57:13, 60:21, 65:9, 마 5:5).
10. 살필지라도. 이에 대한 원어는 ‘히트보난타’으로 가상의 완료 시제로된 전제절이다. 원문상 본 절과 11절은 한 덩어리로서 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주제를 서술하는 전제, 즉 도입 부분이 바로 이 구절이다. 더구나 가상의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미래에 될 그 일의 분명한 성취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주고 있다. 성취의 내용은 온유한 자(11절)와는 달리 악인은 땅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원어는 ‘이해하다’,’ 숙고하다’, ‘생각하다’로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11. 온유한 자. 문자적인 뜻은 ‘겸손한 자’이나 문맥으로 보아 고통받고, 눌리고, 궁핍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한 자로서, 자랑하고 묘만한 악인과는 달리 드러나는 품성에 있어서 대비가 되는 자이다. 이런 자를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로 부른다(Barnes). 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자들이 긍정적인 성품을 유지하게 되는 까닭은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완전한 공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바라고있기 때문이다. 마 5:5에서 주님이 인용한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부한 화평(로브 솰롬). 문자적인 뜻은 ‘많은 평강’이다. 이는 물질적인 부요 그 이상의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기초를 둔 일반적인 의미의 안녕을 가리킨다(Anderson).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 때에만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되기 마련이다. 총체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 어떤 한 부분이라도 평강이 없다면 틀림없이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12. 악인이 … 이를 가는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9절과 32절을 참조하라. 때로 악인은 자신들의 순조로운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인의 의로움을 질투하여 악행의 음모를 계획한다(Dahood). 더욱이 자신들의 번영이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때 그런 일을 행한다. 분노하는 악인은 혼히 그 이를 갈아보이는 들짐승과 흡사하게 극대의 증오심을 나타낸다(35:16, 112:10, 욥16:9, 애 2:16).
(시 37:8~12, 만나주석)
성경예언] 누가 마지막 시대의 이스라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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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언 시리즈]: 앤드류 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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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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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엘리야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맡기라’는 ‘갈랄’으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잠 16:3, 벧전 5:7). 그리고 ‘길’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저를 의지하면.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잠 16:20, 28:26)이다.
저가 이루시고.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으로 문자적인 뜻은 ‘ … 에게로 돌리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시 37:5, 만나주석)
[시편 37편 말씀묵상]
1. 서론. 루터는 시 37편에 관해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외견상 악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관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외견상의 번영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그의 마음속에서 해결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 경험(참조 25절)을 토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바로 그 시간에 죄인들을 벌하시고 의인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다. 이 시는 첫 절의 교훈을 답관체 형태(참조 74, 76쪽)로 확장해 놓았다. 이 시는 상당히 규칙적인 답관체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보통은 두 절마다 히브리어의 각 철자가 하나씩 삽입되어 있다. 7절, 20절, 34절에서는 각 철자가 한 절만을 이끌고 있으며, 29절에는 아인(‘ayin) 대신에 차데(s.ade)가 나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인(‘ayin)이 28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라는 문장을 이끌며 제자리에 정상적으로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인 앞에 접두사 라메드(lamed)가 붙어 있는데, 이는 답관체 시에서 흔치 않은 경우이다. 다른 답관체 시들과 마찬가지로(참조 시 25편), 이 시에서도 사상이 발전돼 나가지 않고 중심주제가 여러 측면으로 확장돼 나간다. 이 시에서는 반복으로 누적된 힘을 통해서 그 교훈이 효력을 발휘한다. 이 시의 주제는 시 73편의 주제와 비슷하며 또한 욥기의 기별과도 유사하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섬기지 않는 자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공의를 다루고 있다.
1. 행악자 … 불의를 행하는 자. ‘행악자’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은 ‘상하게 하다’, ‘괴롭히다’, ‘깨뜨리다’라는 의미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은 ‘불쾌하게 하다’, ‘와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사람에 대해 사용할 경우,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총칭한다(28:3, 119:3, 습 3:5, 13).
불평하지 말며. 여기서 ‘불평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라’으로서 ‘불타다’, ‘불타오르다’, ‘뜨거워지다’ 등을 뜻한다. 이것은 분노가 그 사람을 점점 달아 오르게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창 31:36, 34:7, 삼상 15:11, 삼하 19:43). 본 절은 악인의 번영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의 성공을 보고 계속적으로 그 분한 마음을 키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그들의 소유는 머지않아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분한 마음을 갖는 일은 여호와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괴 상응한 일이된다(37, 3). 본 절과 글자까지도 동일한 내용을 잠 24:19에서 찾아볼 수 있다(A. A. Anderson, D. KIDNER).
(시 37:1, 만나주석)
2. 풀 … 푸른 채소. 일시적인 것 특히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일으키지 않으시는 무상한것을 묘사하는 직유(直兪)로 흔히 사용되는 용어들이다(90:5, 103:15 : 129: 6, 사 40:6, 마 6:30, 약 1:10, 11).
속히. 문자 그대로’재빨리’, ‘신속히’란 뜻으로 당장 시작하지는 않지만 일단 시작이 되면 신속히, 곧 처리될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부사이다.
(시 37:2, 만나주석)
3. 의뢰하여. 안달하는 마음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이다.
거하여. 일종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은 땅에서의 계속적인 삶을 보장한다. 안전을 위해 도망할 필요가 없다.
식물을 삼을지어다. 문자적으로 “먹을 것을 주어라, 너는” 또는 “풀을 먹어라, 너는.” 역시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믿음으로 살아가라”로 번역하기를 선호한다. 이 절은 우리가 악인들이 번영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네 가지 법칙을 제시해 준다. (a) 하나님을 신뢰하라, (b)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라, (c)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곳에서 조용히 거하라, (d)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구하라.
(시 37:3, 재림교주석)
3. 땅에 거하여.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쉐콘 에레츠’으로 문자적인 뜻은 ‘땅에 거하라’늘 명령이다. 그러나 ‘땅에 거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특별한 축복(25:13 신 33:28)임을 고려할 때 본 표현은 바로 앞 문구에서 주어진 명령에 대한 이행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그리하면 땅에 거하게 될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의 유언성을 위해서도 좋다(Perowne, Anderson).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는 동일하게 전제된 명령의 이행에 따른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 즉,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르에 에므나’인데 이는 (1)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품다’(합 2:4), (2) 진리와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다’ 혹은 ‘기뻐하다’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3) ‘안전 보장을 즐거워하다 혹은 기뻐하다’, 고(4) 안전 보장 속에서 양육되다’ 등으로 해석된다 이중 유력한 혜석은 문맥의 흐름과 타 구절(사 33:6)의 지지를 받는(3)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결국 본 구절은, 여호와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행악자와는 달리(1, 2절 주석 참조) 땅 위에서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게 될 것임을 가르쳐 준다.
(시 37:3, 만나주석)
4. 기뻐하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여 사랑한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열망하던 것(문자적으로 “마음의 청원”)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상과 목표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시대의 소망, 668을 참조하라.
(시 37:4, 재림교주석)
4. 여호와를 기뻐하라.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그’은 ‘부드럽다’,’유연하다’, ‘즐거워하다’란 뜻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쁘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본 히브리어의 어원을 ‘분투(奮鬪)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기쁨, 희열’로 보는 견해도 있다(D. Kidner). 또한 ‘너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것을 허락하다’를 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VonRad). 이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는 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욥 22:26, 27:10, 사 58:14).
네 마음의 소원. 이러한 사실은 오직 백성의 소망과 기대를 이루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20:4, 21:2, 마 5:33, 눅 12:31).
(시 37:4, 만나주석)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문자적으로 “너의 길을 여호와께로 굴려라”(참조 시 22:8 주석; 벧전 5:7). 우리는 어떤 짐이 자신이 지기에 너무 무거우면 그것을 그냥 여호와께 굴려 보내면 된다.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영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을 때에도 그의 삶의 굽이마다 이 구절이 자신을 지탱해 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지하면. 참조 3절 주석.
저가 이루시고. 히브리어 아사(‘asah). “그가 실행할 것이다” 또는 “그가 행할 것이다”(개정표준역(RSV))라는 의미. 6절에 그가 행할 일들이 제시되어 있다.
(시 37:5, 재림교주석)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맡기라’는 ‘갈랄’으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잠 16:3, 벧전 5:7). 그리고 ‘길’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저를 의지하면.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잠 16:20, 28:26)이다.
저가 이루시고.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으로 문자적인 뜻은 ‘ … 에게로 돌리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시 37:5, 만나주석)
6. 의. 만일 우리가 중상모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가 구름들을 흩뜨리셔서 우리의 진정한 품성과 동기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히 드러나게 만들 것이다(참조 렘 51:10).
(시 37:6, 재림교주석)
6. 네 의. ‘미쉬파테카’으로서 문자적인 뜻은 ‘의’, ‘재판’, ‘정당함’ 등이다. 인간의 삶을 살펴볼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하여 잠시 동안 진정한 삶의 가치가 불투명해 보일 수있지만, 여호와께서 언약 관계에 있어서 책임을 완수하실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알려진 그분의 약속에 의거한 축복 혹은 저주를 판결 받듯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사 62:1).
빛같이. 하나님의 중재 및 간섭은 어두움 속에서 드러나는 빛의 모습처럼 분명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욥 11:17, 사 58:10, 렘 51:10).
정오의 빛. 원어는 ‘차하림으로 ‘빛’을 뜻하는데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차적인 뜻은 ‘이중의 빛’이 되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히브리어에 있어서 사물의 복수형은 강조 및 그것의 특성의 강력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정오의 빛’은 ‘가장 분명하고 환한 빛’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좀더 가깝다(A. Anderson,J. A. Alexander).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의, 즉 정당함을 밝힘에 있어 완벽하게 분명하면서도 명쾌히 그것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합 3:4)
(시 37:6, 만나주석)
7. 잠잠하고. (제임스왕역(KJV)에는 “rest”[쉬고]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조용히 하라.” 만일 우리가 잠시 동안만이라도 잠잠히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요한 중에 우리의 영혼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참아 기다리라. 참조 시 25:3; 27:14 주석.
불평하여 말지어다. 참조 1절 주석.
(시 37:7, 재림교주석)
7.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이것은 자포자기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불평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을 뜻한다. 진정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62:1, 5, 사 30:15).
자기 길이 형통하며. 문자적인 뜻은 ‘그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며’이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는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성공한자를 염두에 두고있다(73:3). 특히 구약 시대에는 물질적인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였다(욥 42:10).
악한 꾀를 이루는 자(베이쉬 오세 메지모오트). 문자적으로는 ‘목적을 수행하는 자’를 뜻하는데 문맥에 따라 ‘그 성격이 수상하고 간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자’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Anderson).
(시 37:7, 만나주석)
교사들과 관리자들에게
개혁의 장애물
성공의 요소
선교 교사
일꾼양성
성경연구
셋째천사의 기별
교육개혁의 필요성
교회증언: 전도사업
제 2의 브레인 & gut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개역한글)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6, 개역한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 37:7, 개역한글)
음악과 음악지휘자: 노래는 어둠의 세력을 몰아냄
주님의 자유안에서 기뻐하라
세상의 위인들 & 궤변의 위험성:.가려뽑은 기별
연합의 힘: 가려뽑은 기별
연합의 힘: 가려뽑은 기별
드라마 바이블: 하나님의 처방전
이사야 58장(읽어줌 듣기: i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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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37:4)
4. 여호와를 기뻐하라.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그’은 ‘부드럽다’,’유연하다’, ‘즐거워하다’란 뜻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쁘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본 히브리어의 어원을 ‘분투(奮鬪)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기쁨, 희열’로 보는 견해도 있다(D. Kidner). 또한 ‘너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것을 허락하다’를 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VonRad). 이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는 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욥 22:26, 27:10, 사 58:14).
네 마음의 소원. 이러한 사실은 오직 백성의 소망과 기대를 이루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20:4, 21:2, 마 5:33, 눅 12:31).
(시 37:4, 만나주석)
(마가복음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개역한글)
[말씀묵상: 막10:27]
여호와께로써 능치 못할일이 있겠느냐?
스가랴 4:6,
“이는 힘으로 되지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주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멘!
어린 지휘자: 놀랍다
(고린도전서 15:57)
[개역한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른성경]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NASB] but thanks be to God, who gives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KJV] But thanks be to God, which giveth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고전 15:57, 역본대조)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개역한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개역한글)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개역한글)
<말씀묵상 요약:9/9/2019>
(마11:28-30)
주님이 우리의 근심걱정을 깊이
동정하시고 정말 도와주시려고 하시며,
그래서 우리에게 요14:27
약속의 말씀을 주셨군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나도 주위에서 누군가의 태도가
냉냉하고 거칠고 거만하면 반갑지 않다.
그러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
좋고 그런사람이 존경스럽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네...
그렇지,
주님의 이타심과 자아희생이
성령의 힘으로
내안에서
실천되면, 순종의 열매가 맺혀져
비로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 있으리!
- 9월 가을에, 샤일(Chail)-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개역한글)
초여름 어릴적 시골풍경 & 명곡선율
경음악: 말씀묵상
말씀묵상: 숲속걷기명상
<인생고민 해결연구소>
법륜스님: 즉문즉설
[데살로니가 전서 5:26-18]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개역한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개역한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개역한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개역한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 8:31, 개역한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개역한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개역한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개역한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개역한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개역한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개역한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
(요한복음14: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새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근심하지말고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시편 40:1-3)
“내가 여호를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내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하나님께 돌릴 찬송을 내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출애굽기 14: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마가복음 10:27)
“여호와께로서 능치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 (벧후 1:2)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10)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13)
(시 103:17-18)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https://youtu.be/m6l4wdMwi_0
마라나타!
유해한 오류:
이우석 의사 & more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거룩한 은혜 & 기적
교육: 성경의 신비
참된 회개& 순수종교(박보영 목사 2)
순수한 종교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만나주석: 눅6:38(불변의 인)
38. 주라. 이 명령형은 다른 사람들의 곤궁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급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주라는 뜻이며 또한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 동사(디도미)는 요 3:16’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에도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니와(행 20:35), 그 이유는 서슴없이 베푼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후히 되어 … 주리라. ‘후히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칼론’은 ‘분량’, ‘척도’(메트론)라는 말과 ‘좋은’(칼로스)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좋은 분량으로 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준다는 의미이다. 즉 굵은 콩 사이로 작은 조나 깨를 섞듯이 조금도 빈틈없이 누르고 흔들어서 채울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채워서 준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임한다.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안티메트레데세타이). 이 단어는 ‘다시’, ‘반복’을 나타내는 단어 ‘안티’과 ‘재다’,’측량하다’는 뜻의 단어 ‘메트레오’의 합성어로서 ‘다시 측정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는가에 따라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눅 6:38, 만나주석)
이우석 의사 & more
도르가: 죽은자가 살아남
박보영 목사 간증1
시련중에 담대히 그분을 바라보는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ㅡ
“담대하라 주를 바라는 너희 모든 자들아, 그가 너희 마음에 힘을 주시리라” (시 31:24)
오랜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일찌라도 자주 가장 무서운 의심과 흔들림의 공격을 받는다.
그대는 이 유혹들에 대하여 그대의 경우는 절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 안에 소망을 가지고 그를 의뢰하고 그의 허락들 가운데서 안식을 얻으라.
마귀가 그의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오면 그대는 그대의 마음 문을 닫아라.
그의 지옥의 그늘에 그대가 거하지 않도록 그대의 눈을 감으라. 영원한 사물들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그대의 눈을 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매시간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대의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전투에 있어서 그대를 용감하게 만들 것이다.
(높은 부르심 86.2, 86.3)
<여호수아 1:5>
[개역한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바른성경] 네가 사는 모든 날 동안 아무도 네 앞에 대항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너를 떠나지 않고 너를 버리지도 않을 것이니,
[NASB] "No man will be able to stand before you all the days of your life. Just as I have been with Moses, I will be with you; I will not fail you or forsake you.
[KJV] There shall not any man be able to stand before thee all the days of thy life: as I was with Moses, so I will be with thee: I will not fail thee, nor forsake thee.(수 1:5, 역본대조)
[여호수아 1:5]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너를 능히 대적할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네 앞에 설 수 있는 자’란 뜻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듯이, 여호수아 앞에는 어느 누구도 대적하려고 설 수 없다는 말이다. 여호수아에게 이처럼 특별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은 곧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시 무수한 원수들과의 전투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40년 동안 모세 곁에서 직접 그와 함께 해 주셨던(출 3:12, 4:12, 15) 하나님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뚜렷히 목격한 여호수아이기에, 지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이 말씀은 그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것이다.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이 말은 앞서 약속한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는 말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말씀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형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창 26:24, 28:15, 31:3). 이러한 맥락에서 후일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최후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하나님께서 그 택한 자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마 1:23)사상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하나의 큰 맥이다.
떠나지 아니하며. ‘떠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파’는 ‘기울다’, ‘떨어뜨리다’를 뜻한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이 말은 ‘떨어뜨리지 아니하며’(Blair)로 번역된다.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앞에 나오는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시 37:25-33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의 수중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그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수 1:5, 만나주석)
윤동혁 피디의 건강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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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하신분의 임재: 성화된 생애
지칠줄 모르는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ㅡ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가련하고 떠는 영혼이여,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머물라. 그리하는 가운데 원수의 차꼬는 깨어지고 그의 제안은 힘이 없어질 것이다.
원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압박당한 영혼이여 평안히 가라. 용기를 가지라.
그대의 가련하고 실의에 찬 마음에게 말하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는 것을 안다. 그분을 신뢰하라.
그대에게 근심과 슬픔을 가져오는 것들을 생각지 말라. 모든 불쾌한 생각으로부터 떠나서 귀한 예수님을 생각하라.
구원하시는 능력, 그대를 향한 지칠 줄 모르고 끝없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
(교회증언 2권 319.2)
[신명기 31:6]
[개역한글]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바른성경] 강하고 담대하여라. 두려워하거나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참으로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가시고 너를 떠나지 않으시며 너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NASB]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tremble at them, for the LORD your God is the one who goes with you. He will not fail you or forsake you."
[KJV] Be strong and of a good courage, fear not, nor be afraid of them: for the LORD thy God, he it is that doth go with thee; he will not fail thee, nor forsake thee.(신 31:6, 역본대조)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tremble at them, for the LORD your God is the one who goes with you. He will not fail you or forsake you."
[KJV] Be strong and of a good courage, fear not, nor be afraid of them: for the LORD thy God, he it is that doth go with thee; he will not fail thee, nor forsake thee.(신 31:6, 역본대조)
싫은사람이 너무 많아요: 희망세상
Good news chariot’s a coming
Kings Heralds & more
Kings Heralds
자제력:
https://m.egwwritings.org/ko/book/11309.85#85
“여호와께로서 능치못할일이
있겠느냐?”
(막10:27)
Better
Summary of life skill(Dale Carnegie)
핵심: 인생기술(데일 카네기)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개역한글)
(요14:27)
영어회화: 영어공부 & more
솔직하고 진지하게 칭찬하라: 인간관계 마스터
Dale Carnegie & more
데일 카네기 : 인생사는법 비결 & skill
데일 카네기 : 인생사는법 비결 & skill
Ministry reports
자제력:
여명을 알리는 사자: 각시대의 대쟁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너근심걱정 말아라 & more
Pryer room(기도의 방)
기도제목
-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 어려움을 넘어 구원하시는 은혜
- 하나님의 능력에 집중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악을 선으로 갚으려노력하는 선한자들을 경멸하는악의 세대들 속에서취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조치가 필요하다.눅10:19 & 출14:14 약속성취 필요!금식기도! & 이사야 58장 실천중요!
극렬한 풀무불
극렬한 풀무불: 성화된 생애
We’ve come to this far by faith: Heritage singers
은혜의식이 아니라 공로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공로의식에 빠진 추한 사람들”이란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첫째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빠지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게 해야 하는데 그래도 자기가 뭔가 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해주고 높여 주기를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둘째 섭섭함을 잘 느낍니다.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섭섭 마귀의 종이 되어 목사님이 알아주거나 칭찬해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상처받았다며 마음의 병에 빠집니다.
셋째로 원망과 불평의 종이 됩니다.
섭섭함의 단계에서 그것이 해소되지 않을 때 섭섭함은 상황에 대한 불평과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성장해갑니다.
교회 사역에 무관심,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해도 알아주지 않는데 뭐 하러 애를 쓰나 하는 회의가 그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교만해집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한 것처럼 떠벌리고 다닙니다.
부족하고 미련한 자신을 사용하여 큰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했다고 광고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공로의식은 초심을 변질시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역사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내가 없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
이런 마음이 혹시 내 안에 있지 않나요?
바울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하면서도 기쁨으로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의식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식이 식어지면 금방 보상의식으로 바뀌게 되고, 보상의식은 비교의식을 가지게 하며 공로 의식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신앙생활이 되며 주의 사역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거침이 되며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내안에 있는 공로의식을 버리고 바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운 말과 행동으로 은혜의식이 충만해져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의료선교
Outpost Centers International & more
Steps to miracles: WD Frazee sermons
WD Frazee sermons & more
W.D. Frazee & more
성경낭독: 나 여호와가 응답하리라
이사야 41장
성경낭독: 이사야 40장
이사야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개역한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바른성경]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 하였다.
[NASB] The grass withers, the flower fades, But the word of our God stands forever.
[KJV] The grass withereth, the flower fadeth: but the word of our God shall stand for ever.(사 40:8, 역본대조)
8. 풀은 마르고.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생명력에 관한 한 인간은 들풀보다 우월한 것이 없다(참조 전 3:9~21).
우리 하나님의 말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섭취하여야 할 영적 양식이다(마 4:4; 요 6:48~63).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는 진리의 저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 13:8). 자기의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주께 오는 자들은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요 6:35)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다(요 4:14).
(사 40:8, 재림교주석)
8.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본문의 의미는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뿐만 아니라
유효성, 곧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서리라’로 번역된 ‘야쿰’이 바로
‘유효성’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용어이다.
(사 40:8, 만나주석)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한잔의 우유 & 친절
재림교회 이야기 & more
의료선교
Outpost Centers International & more
31장 평생사업: 교육
2장 혼인잔치의 부르심: 설교와 강연
믿음과 기도
창조: 지구가 증인이다
채영석 목사 & more
색다른 기별: 채영석 목사
Beyond disaster
Beyond conflict
드라마 바이블: 하나님의 처방전
이사야 58장(읽어줌 듣기)
재림교회 이야기 & more
[Fast 제자훈련]
Survival Kit 1 놀라운 은혜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예레미아 31:3)
The LORD hath appeared of old unto me, saying, Yea, I have loved thee with an ev- erlasting love: therefore with lovingkind- ness have I drawn thee.
Jeremiah 31:3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예수님 바라보기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I am the vine, ye are the branches: He that abideth in me, and I in him, the same brin- geth forth much fruit: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John 15:5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유혹 극복하기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If w 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 John 1:9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하나님의 뜻 알기 4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Proverbs 3:5~6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성도의 교제 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And let us consider one another t o pro- voke unto love and to good works:
Not forsaking the assembling of ourselves together, as the manner of some is; but exhorting one another: and so much the more, as ye see the day approaching.
Hebrews 10:24~25
Basic Training 1 헌신으로의 초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FAST
기본훈련
And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 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John 17:3
FAST
성경암송 기억절
FAST KIT LIST
_ Spripture Memory
SURVIVAL KIT
1
BASIC TRAINING
2
TEAM TACTICS
3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01 놀라운 은혜 04p 02 예수님 바라보기 05p 03 유혹 극복하기 06p 04 하나님의 뜻 알기 07p 05 성도의 교제 08p
기본훈련
01 헌신으로의 초대 10p 02 아침 묵상 11p 03 하나님의 약속들 12p 04 시작하기 13p 05 성령의 검 14p 06 개인 전도 15p 07 믿음의 용사들 16p 08 증식의 비밀 17p 09 목적이 있는 생애 18p
소그룹 팀 전략
01 시간의 필요 02 성공을 위한 03 기초 세우기 04 전도의 동력 05 생명의 말씀
20p 전략 21p 22p 23p 24p 06 잃은자를 위한 노력 25p 07 시작하기 26p 08 리더로의 부르심 27p 09 세계를 향한 비전 28p
Survival KitSK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1. 놀라운 은혜
2. 예수님 바라보기 3. 유혹 극복하기
4. 하나님의 뜻 알기 5. 성도의 교제
4P
5P
6P
7P 8P
FAST KIT _ Spripture Memory
Survival Kit 1 놀라운 은혜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예레미아 31:3
The LORD hath appeared of old unto me, saying, Yea, I have loved thee with an ev- erlasting love: therefore with lovingkind- ness have I drawn thee.
Jeremiah 31:3
- 4-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예수님 바라보기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I am the vine, ye are the branches: He that abideth in me, and I in him, the same brin- geth forth much fruit: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John 15:5
- 5-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유혹 극복하기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If w 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 John 1:9
- 6-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하나님의 뜻 알기 4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Proverbs 3:5~6
- 7-
Survival Kit
FAST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성도의 교제 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25
And let us consider one another t o pro- voke unto love and to good works:
Not forsaking the assembling of ourselves together, as the manner of some is; but exhorting one another: and so much the more, as ye see the day approaching.
Hebrews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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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기본훈련
BT
1. 헌신으로의 초대 2. 아침 묵상
3. 하나님의 약속들 4. 시작하기
5. 성령의 검
6. 개인 전도
7. 믿음의 용사들
8. 증식의 비밀
9. 목적이 있는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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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1 헌신으로의 초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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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And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 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John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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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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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아침 묵상 2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Cause me to hear t hy l ovingkindness in the morning; for in thee do I trust: cause me to k now the w ay wherein I should walk; for I lift up my soul unto thee.
Psalms 143:8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디모데전서 4:15
Be diligent in these matters; give yourself wholly to them, so that everyone may see your progress.
1 Timothy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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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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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하나님의 약속들 3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John 15:7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로마서 4:20
He staggered not a t the p romise of God through unbelief; but was strong in faith, giving glory to God;
Romans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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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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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시작하기 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3:4
The soul of the sluggard desireth, and hath nothing: but the soul of the diligent shall be made fat.
Proverbs 13:4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고린도후서 8:11
Now therefore perform the doing of it; that as there w as a readiness t o will, so there m ay be a performance also out of that which ye have.
2 Corinthians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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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5 성령의 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명기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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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And these words, which I command thee this day, shall be in thine heart:
Deuteronomy 6:6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잠언 4:13
Hold on to instruction, do not let it go; guard it well, for it is your life.
Proverbs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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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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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개인전도 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For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But God commendeth his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yet sinners, Christ died for us.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로마서 5:8
For as many as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they are the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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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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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믿음의 용사들 7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15:22
Without counsel purposes are disappoint- ed: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lors they are established.
Proverbs 15:22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3:13
But e xhort one another daily, while it is called To day; lest any of you be hardened through the deceitfulness of sin.
Hebrews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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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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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증식의 비밀 8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사야 60:22
A little one shall become a thousand, and a small one a strong n ation: I the LORD will hasten it in his time.
Isaiah 60: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2
And the things that thou hast heard of me among many witnesses, the same commit thou to faithful men, who shall be able to teach others also.
2 Timoth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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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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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훈련
목적이 있는 생애 9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요한이서 1:8
Look to yourselves, that we lose not those things which w e have w rought, but that we receive a full reward.
2 John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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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소그룹 팀 전략
01 시간의 필요
02 성공을 위한 전략
03 기초 세우기
04 전도의 동력
05 생명의 말씀
06 잃은 자를 위한 노력
07 시작하기
08 리더로의 부르심
09 세계를 향한 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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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1 시간의 필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마가복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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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And he ordained t welve, that they should be with him, and that he might send them forth to preach,
Mark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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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2 성공을 위한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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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20~21
Now unto him that is able to do exceeding abundantly a bove all that we ask or think,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eth in us,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 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 orld without end. Amen.
Ephesians 3:20~21
로마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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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3 기초 세우기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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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An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 tles' doctrine and fellowship, and in break- ing of bread, and in prayers.
Acts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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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4 전도의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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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4~15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b e- 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n were all dead:
And that he died for all, that they which live should not henceforth live unto themselves, but unto him which died for them, and rose again.
2 Corinthians 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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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5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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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복음 24:32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Did not our heart burn within u s, while he talked with us by the way, and while he opened to us the scriptures?
Luke 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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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6 잃은자를 위한 노력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로마서 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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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Never be lacking in zeal, but keep your spir- itual fervor, serving the Lord.
Romans 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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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7 시작하기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한복음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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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John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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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8 리더로의 부르심
FAST
소그룹 팀 전략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37~38
Then saith he unto his disciples, The harvest truly is plenteous, but the labourers are few; Pray y e therefore the L ord of the harvest, that he will send f orth labourers i nto his harvest.
Matthew 9: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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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m Tactics 9 세계를 향한 비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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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팀 전략
Then said Jesus t o them again, P eace be unto you: as my Father hath sent me, even so send I you.
John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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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암송공식 Scripture Memory Formula
SM = SM+R2
SM = 성구 암송 (Scripture Memory)
M1 = 마음 준비 (Mindset) M2 = 외우기 (Memorize) M3 = 묵상하기 (Meditate)
R = 매일 복습하기 (Daily Review) R2 = 재복습하기 (Back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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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2)
너의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6: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순종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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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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